-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08/17 01:08:37
Name   아침커피
Link #1   https://crmn.tistory.com/91
Subject   술도 차도 아닌 것의 맛
한번 상상해 보겠습니다. 콜라를 마시기 위해 사람들이 전용 잔을 삽니다. 콜라 재료의 원산지에 따라 콜라 가격에 차등을 둡니다. 여럿이서 콜라를 마실 때에는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콜라를 따라 줄 때에는 두 손으로 따라야 하며 잔이 비지 않은 상태에서 콜라를 더 따라주면 예의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욕을 먹습니다. 숙성 년도에 따라 저급 콜라와 고급 콜라가 구분되고 고급으로 갈 수록 가격이 한도 끝도 없이 올라갑니다. 고급 콜라를 마시는 것이 상류 사회의 척도인 양 취급되며 나중에는 콜라를 마시는 것이 정신 수양의 척도로까지 인식되어 콜라도(道)라는 것이 생겨납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지만 콜라를 술이나 차로 바꾸면 그 순간 모두 말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술과 차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문화 요소라는 뜻입니다. 시선(詩仙), 시를 쓰는 신선이라고까지 불렸던 이태백은 對酒還自傾(대주환자경, "술을 대하니 다시 또 술을 기울이네" 라는 뜻)이라는 시구를 썼고 불교 선종의 창시자인 달마가 잠에서 깨려고 잘라버린 눈꺼풀은 차나무가 되었다고 합니다. 술과 차는 이렇게 종교에까지 연결되는 음료인 것입니다. 이태백이 시선(詩仙)이라고 불렸던 것과 달마 전설에서 알 수 있듯 도교의 음료는 술이고 불교의 음료는 차입니다.

술과 차는 모든 면에서 대조적입니다. 술은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지만 차는 정신을 맑게 합니다. 술은 사람을 졸리게 하지만 차는 잠이 확 깨게 합니다. 술을 마신 사람은 감정적이 되지만 차를 마신 사람은 이성적이 됩니다. 그래서 술은 밤의 음료이고 차는 아침의 음료입니다. 술과 차라는 이 두 음료가 지금까지 좁게는 한국의, 넓게는 동아시아를 지배한 두 상반되는 사고방식을 대표해 왔다고 말해도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 한국에 술도 차도 아닌 새로운 음료가 들어왔습니다. 잠이 확 깨게 하는 것은 차를 닮았는데 많이 마시면 감정적으로 흥분되게 하는 것은 술을 닮았습니다. 마시면 마실수록 정신을 빠릿빠릿하게 만드는 차의 특성이 있는가 하면 중독되게 만드는 술의 특성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색깔은 차처럼 은은하지도 술처럼 투명하지도 않은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새까만 색입니다. 바로 커피입니다.

커피는 맨 위에서 언급했던 술과 차의 모든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커피를 마시기 위한 전용 잔이 있고 커피 원두의 원산지에 따라 가격이 달라집니다. 커피를 마시는 것은 세련된 문화로 취급되며 다도(茶道)에서만큼은 아니지만 커피를 만드는 도구들은 단순히 도구를 넘어서 예술의 언저리를 건드리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술이 도교와, 차가 불교와 연결되듯 커피는 이슬람교와 기독교에 연결됩니다. 커피는 한동안 이슬람 문화권의 음료였습니다. 이슬람권에서는 종교 행사 중에 잘 깨어있기 위한 용도로 커피를 애용했고, 이슬람과 사이가 안 좋았던 유럽에서는 당연히 커피를 싫어해서 악마의 음료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그렇지만 야사에 따르면 교황 클레멘스 8세가 커피가 너무 맛있어서 커피를 축복한 이후로 기독교권에서도 커피를 널리 마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교황 클레멘스 8세의 임기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에 시작되었고 우리나라에 커피가 들어온 것은 1800년대 후반이니 유럽과 한국의 커피 역사는 약 300년 정도 차이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문화의 한 요소이며 종교로까지 이어지는 음료인 커피가 한국에서 인기를 끈 지도 벌써 수십 년이 지났습니다. 술과 차가 근대까지의 한국의 두 생활양식을 대표한다는 가설이 맞다면 현대 한국에는 술도 차도 아닌 커피로 대표되는 새로운 생활양식이 존재한다는 말도 맞는 말이 될 것입니다. 한국의 커피스러운 생활양식이란 뭘까요. 머릿속에 뒤죽박죽 떠오르는 많은 대답 중 하나만 꼽으라면 저는 '탈진'을 꼽겠습니다.

커피는 탈진한 사람들이 내일의 힘을 미리 끌어다 쓸 때 사용하는 음료입니다. 대학생들은 시험기간에 밤을 새기 위해 커피를 마십니다. 똑같이 카페인이 들어있다고 해도 밤을 새기 위해 한밤중에 차를 마시는 학생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직장인들은 점심시간에 나와서 본인들 표현대로 하자면 '살기 위해' 아메리카노를 테이크아웃해서 몇백 밀리리터씩 빨대로 쪽쪽 빨아 마십니다. 그러다가 카페인에 내성이 생겨버린 사람들은 커피를 넘어서서 박카스나 레드불 같은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기 시작합니다.

오해를 풀기 위해 밝혀두자면 한국에는 커피를 음미하며 즐기는 애호가들이 물론 매우 많습니다.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어떤 음료를 마시는 전체 인구 중 탈진해서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한 용도로 그 음료를 마시는 사람의 비율이 술이나 차보다 커피의 경우에 압도적으로 높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위에 적었듯이 낮의 음료는 차였고 밤의 음료는 술이었습니다. 낮술이라는 단어가 따로 만들어졌어야 했을 정도로 술은 밤에 먹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차는 낮에나 밤에나 다 마실 수 있지만 밤에 차를 마실 때에는 차분한 마음으로 잘 자기 위해 마시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즉 낮에는 잘 깨어 있고 밤에는 잔다는 극히 상식적인 생활 양식이 술과 차에 모두 배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커피는 그것을 깨 버렸습니다. 밤에는 자야 하는데 억지로 깨어있기 위해 커피를 마십니다. 그러니 늦게 자게 되어 다음날에 피곤해지고, 피곤하니 점심 때에 졸지 않으려고 커피를 마십니다. 악순환의 반복이고 모든 것이 경쟁적으로 돌아가는 현대 사회가 만들어낸 슬픈 모습입니다. 지금의 한국 사람들 중 많은 수는 '마시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커피를 마십니다. 현대 사회가 한국에서 커피의 양적 팽창은 이루어냈지만 사람들이 커피를 진정 즐기게 하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에드워드 애비(Edward Abbey, 1927-1989)라는 미국의 유명 작가가 1982년에 쓴 Down the River라는 책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우리네 문화는 커피와 휘발유 위에서 돌아간다. 첫째 것의 맛이 둘째 것과 같을 때가 종종 있다. (Our culture runs on coffee and gasoline, the first often tasting like the second.)" 이 말은 현대 한국에서 지금도 현재진행형입니다. 한국의 커피는 지금도 종종 휘발유 맛인 것입니다.



19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1075 일상/생각총기금지국가 한국에서 밀리터리 컨텐츠는 제한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20 ar15Lover 20/10/19 5531 1
    13619 방송/연예2023 걸그룹 1/6 13 헬리제의우울 23/03/05 5531 13
    757 생활체육동아시안컵 최종전이 진행중입니다. 5 별비 15/08/09 5532 0
    5092 일상/생각8살 시골소년의 퀘스트 수행 이야기. 11 tannenbaum 17/03/06 5532 11
    3842 게임[불판] 시즌6 롤드컵 16강 5일차 불판 #1 55 곧내려갈게요 16/10/06 5532 0
    4272 정치주갤펌) 박지원과 비박이 꿈꾸는 시나리오 11 님니리님님 16/12/01 5532 0
    6354 문화/예술밴드 음악 하나 듣고 가세요. 1 한달살이 17/09/28 5532 1
    11072 스포츠[K리그] 1부, 2부 모두 여러모로 중요한 이번주 일정입니다 8 Broccoli 20/10/18 5532 0
    11515 사회더 현대. 서울 근황 4 Leeka 21/03/23 5532 1
    4244 일상/생각자격있는 시민, 민주주의의 정치. 10 nickyo 16/11/28 5533 6
    8329 스포츠xG 관련된 프리미어리그 팀들 몇몇 통계 손금불산입 18/10/05 5533 3
    11687 게임[LOL] 5월 18일 화요일 오늘의 일정 1 발그레 아이네꼬 21/05/17 5533 2
    14098 기타[불판] 제6호 태풍 카눈 기상 관련 불판 98 swear 23/08/10 5533 0
    12636 일상/생각지겨운 다이어트를 또 도전합니다 5 쿵파 22/03/16 5534 5
    11193 일상/생각할아버지, 데리버거, 수영장 2 사이시옷 20/12/03 5535 23
    3550 스포츠리우올림픽의 한 풍경 20 눈부심 16/08/22 5536 0
    5111 기타잡상. 9 왈츠 17/03/08 5536 2
    10864 문화/예술술도 차도 아닌 것의 맛 7 아침커피 20/08/17 5536 19
    3668 기타mbc 다큐멘터리 제작팀에서 다양한 사례자를 찾습니다. 25 개인정보취급방침 16/09/08 5537 1
    8031 사회동일범죄 동일처벌과 워마드 운영자 체포영장에 대해 7 DrCuddy 18/08/10 5537 3
    11152 일상/생각이어령 선생님과의 대화 4 아침커피 20/11/19 5537 13
    11230 IT/컴퓨터코드 난독화의 추억 13 아침커피 20/12/15 5537 3
    968 영화제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 시리즈.jpg 7 김치찌개 15/09/11 5538 0
    1992 방송/연예치즈인더트랩 1~2화 짧은 평 1 Leeka 16/01/10 5538 0
    2591 방송/연예k팝스타5 끝 5 헬리제의우울 16/04/11 5538 1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