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6/03/05 02:40:14
Name   깊은잠
Link #1   http://goo.gl/WzNEGN
Subject   어느 면접 후기와 유리천장
"남자라서 되실 것 같아요."

얼마 전 어디 연구직 면접이 끝나고 같은 조에 있던 여자 분이 제게 건넨 말입니다. 조원들은 모두 저보다 긴 실무경력이 있었고 면접 준비도 성의껏 해서 왔습니다. 저는 경력도 방향도 준비 상태도 달랐습니다. 솔직히 같은 면접장에 있다는 것만으로 억울할 수 있을 만큼 그들과 저 사이에는 분명한 수준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자기가 보기에 면접관은 유독 제 서류만 오래도록 관심을 두고 살피더라는 것입니다. 실은 저도 눈치 채고 있었습니다. 면접관은 제 서류만 유심히 봤습니다. 저는 조원 가운데 유일한 남자였습니다.

물론 그 이유가 성별 때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저는 자기소개 같은 부분을 매우 짧게 써서 냈으니까, 예컨대 정보가 부족해서 질문거리를 찾는데 시간이 더 걸렸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니면 제가 조금 특이하고 뻔뻔한 사람이라 흥미를 두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성별 간 형평성을 의심할 만한 요소들은 다른 곳에도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 조직의 고위직은 모두 남자입니다. 큰 조직이라 인터넷에 모두 공개되어 있죠. 면접관 네 사람 중에서도 실제 질문을 맡은 평가자 셋이 남자였고, 유일한 여성은 안내와 시간 조정의 부차적인 역할만 했습니다. 여성이 의사결정권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큰 심증은 질문에 있었습니다. 아이가 있는 기혼여성 지원자에게 면접관은 아이를 키우면서 일할 수 있을지를 회의적인 태도로 물었습니다. 결혼 여부, 육아 여부가 실제 그곳 업무에 지장이 되는 것인지, 아니면 흔한 인식의 문제인지 제가 알 도리는 없죠. 하지만 적어도 이런 인사 구조, 그리고 이런 질문을 하는 문화라면 여성에 대한 공평함을 기대하지 않는 쪽이 정상일 겁니다.

"여성이 일하기 좋은 나라 순위의 최하위는 일본, 터키, 한국이다. 학위를 얻고, 직업을 갖고, 고위직에 오를 기회 모두 남성이 더 유리하다." 링크의 이코노미스트 기사입니다. 그 조직 뿐 아니라 다른 곳도 대부분은 아직까지 비슷한 문화니 이런 평가가 나왔을 테지요. 예전에 일하던 연구원 역시 절대적 성비를 따지면 여성이 반 이상일지는 몰라도 제대로 된 연봉을 받는 소수 정규직, 특히 실권을 가진 선임연구직은 절대다수가 남자였습니다. 여성이 많았던 이유는 비정규직의 급여가 박해서 결혼을 준비해야 하는 젊은 연령대의 남자들이 빨리 그만두기 때문이었죠. 그럼에도 임금 인상이 없는 이유에는 암묵적으로 하위직을 여성의 자리로 배정해버린 의식이 있을 겁니다. 여자는 책임을 덜 맡으니 돈을 덜 받아도 된다는 뿌리 깊은 차별의식 말입니다. 이번 면접에서 결과적으로 저는 탈락했고, 그래서 최소한 아주 능력 없는 사람을 성별을 이유로 뽑지는 않는단 증거가 생긴 셈이지만, 두꺼운 유리천장이 있어 결국 여성이 올라갈 수 없는 조직이라면 남녀 화장실 표지판 색깔을 똑같이 청색으로 칠해둔 작은 신경 씀씀이 같은 건 아무 의미도 없을 겁니다.

그날 긴장 속에서 오간 많은 말들 가운데 가장 깊게 박힌 것은 바로 그 자녀를 둔 지원자의 대답입니다. 누가 들어도 필사적임을 느낄 수 있는 목소리로 그는 대답했습니다. "지방에 있는 시부모에게 아이를 맡겼고 주말에만 보러 갑니다. 서울에는 남편과 둘만 있으니 괜찮습니다." 아, 이것은 비극입니다. 아이 엄마가 스스로 아이를 키울 수 없는 불행을 당당함을 가장해서 대답해야 하는 더 큰 불행입니다. 한 아이의 어머니로 하여금 이런 말을 하게 만드는 사회는 잔인합니다. 그러니 그 자리의 모든 여성 지원자들이 성별이라는 특권 유무의 차이를 절감했을 겁니다. "남자라서..."라는 말이, 실은 그 앞에 '당신은 우리보다 한참 모자란 사람인데도' 라는 내용이 생략된 굴욕적인 말임에도 제가 아무런 대꾸를 할 수 없었던 이유입니다. 만약 붙었다면, 저는 그 한 마디를 기억하며 회사에 의문 제기를 할 수 있었을까요. 아니면 최소한 부채의식을 갖고 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탈락한 주제에 할 말은 아니지만, 솔직히 어느 쪽도 자신이 없습니다. 면접을 마치고 돌아오는 지하철 내내 대답 실수한 것만이 머리를 맴돌고 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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